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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추도식/재단/갤러리/서거/유서/짤/서거일/13주기/나이)

by Fact One 2022. 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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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

 

2. 약력

 

  • 1959.2. 진영대창국민학교 졸업
  • 1963.2. 진영중학교 졸업
  • 1966.2. 부산상업고등학교 졸업
  • 1966. 삼해공업 사원
  • 1966. 제7회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 합격
  • 1971. 육군 제1군사령부 제3군단 제12보병사단 제52보병연대 2대대 상병 만기 제대
  • 1975.3. 제17회 사법시험 합격
  • 1977.8. 제7기 사법연수원 수료
  • 1977.9. 대전지방법원 판사 (형사합의부 左배석 판사)
  • 1978. 노무현 법률사무소 변호사
  • 1981. 부산YMCA 이사
  • 1982. 노무현·문재인 법률사무소 변호사
  • 1984. 부산공해문제연구소 이사
  • 1985.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장
  • 1987. 부산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장
  • 1987. 공정선거감시운동 부산본부장
  • 1988.5. 제13대 국회의원 (부산 동)
  • 1988.6. 제13대 국회 노동위원회 간사
  • 1988.11. 제13대 국회 제5공화국에있어서의정치권력형비리조사특별위원회 위원
  • 1988. 통일민주당 노·사문제특별위원장
  • 1990.7. 민주당 기획조정실장
  • 1991.9. 민주당 대변인
  • 1992.3.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민주당 후보 (부산 동 / 낙선)
  • 1992.10. 제14대 대통령 선거 김대중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청년특별위원장 겸 물결유세단장
  • 1993.3. 민주당 최고위원
  • 1993. 지방자치실무연구소 소장
  • 1993. 법무법인 해마루 변호사
  • 1995.6.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민주당 부산광역시장 후보
  • 1995. 통합민주당 부총재
  • 1996.4.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통합민주당 후보 (서울 종로)
  • 1996. 국민통합추진회의 상임집행위원
  • 1997.11.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 1997.11. 제15대 대통령 선거 김대중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파랑새유세단장
  • 1998.7. 제15대 국회의원 (서울 종로)
  • 1998.7. 제15대 국회 교육위원회 위원
  • 1998.7. 제15대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
  • 1998. 새정치국민회의 부당노동행위대책특별위원장
  • 1998. 고려대학교 노동대학원 노동정책과정 수료
  • 1999.2. 새정치국민회의 경남도지부장
  • 1999. 새정치국민회의 동남지역발전특위위원장
  • 1999. 새정치국민회의 실업대책특별위원회 자문위원장
  • 1999. 고려대학교 정책대학원 최고위정책과정 수료
  • 2000.4.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새천년민주당 후보 (부산 북·강서 을)
  • 2000.8.7. ~ 2001.3.25. 제6대 해양수산부장관 (국민의 정부)
  • 2001.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
  • 2001. 법무법인 부산 변호사
  • 2001.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
  • 2002.4. 제16대 대통령 선거 새천년민주당 후보
  • 2003.2. ~ 2008.2. 제16대 대한민국 대통령
  • 2004.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명예정치학박사
  • 2006. 알제리 알제대학교 명예정치학박사
  • 2007. 원광대학교 명예정치학박사
  • 2008. 맑은물사랑사람들 명예고문
  • 2008. 영농법인 주식회사 봉하마을 이사

 

3. 정치적 성향

 

자유주의자다.
정치적으로도 이전 정권에 비해서 탈권위주의를 적극적으로 추구하였으며, 사회문화적으로도 이전 시대에는 금기시 되었던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더 수용하였으며 경제적으로는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이어나갔다.
종합적으로 봤을 때 보수자유주의적인 성향이 있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에 비하면 철저하게 제3의 길을 따른 사회자유주의 노선을 따랐다.
대외적으로는 김대중 정부의 대북포용정책을 이어나가고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대미관계에서 좀더 자주성을 추구했다.
그래서 기존의 상대적으로 보수적이었던 민주당의 주류였던 동교동계와 정치적으로 선을 그으면서 열린우리당의 창당을 주도했다.

 

4. 묘소

 

고향인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19-4 봉하마을에 위치해 있다.
장사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2009년 8월 5일에 보건복지가족부 국가보존묘지 심의 위원회 심의를 거쳐 국가보존묘지 제1호로 지정되었다.
전직 대통령으로서 국립현충원에 안치되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본인이 남긴 유서엔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 달라”라는 부탁이 있었다.
유족들은 고민 끝에 봉하마을 대통령 사저 뒷산에 묘역을 마련하기로 결정했다.
묘역 설계는 장례식 전날 모인 "작은 비석 위원회"의 일원인 승효상 이로재 대표가 맡았다.
이 묘지의 특성중 하나는 묘역 표면에 모인 1만 5000개의 박석에 적힌 글귀들인데, 국민모금으로 노 전 대통령에게 전할 어귀들이다.
묘역은 봉화산에서 구해온 너럭바위 위에 지관 스님이 쓴 '대통령 노무현' 6글자가 새겨져 있고, 그 밑 묘판에는 신영복이 쓴(일명 신영복체)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4월 포럼회에서 강연 중 말한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가 적혀있다.
가끔씩 부엉이 바위에 두부를 던지는 등 고인모독을 하는 경우가 있다.
또, 노무현 대통령 묘소가 있는 곳에 배설물을 투척한 아주 경악할 만한 사건들이 종종 있었다.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2010년대 초까지는 묘소 바위 앞까지 갈 수 있었으나 한동안은 묘소 근처에 가는 건 불가능했으며, 좀 떨어진 곳까지만 접근 가능했다.
현재는 묘소 바위 옆에 순경이 배치되는 조건으로 다가갈 수 있다.
전직 대통령의 묘역 중 가장 큰 묘역(3206㎡)으로 법적 묘지 면적의 약 100배가 좀 넘는다.
고인은 작은 비석 하나만 남기라 했는데, 어쩌다 보니 가장 큰 무덤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마찬가지로 국립묘지에 들어가지 않은 윤보선과 같이 묘지가 국가보존묘지로 지정되어 사실상 국립묘지 대우를 받으며, 묘지 관리는 국가 외에도 봉하마을과 노무현재단도 공동으로 하는 듯 하다.
현재 문재인 정부 국무회의 개정안에 의거해서 국립묘지에 모셔지지 않은 전직 대통령의 묘는 대통령령에 따라서 청와대 및 정부가 예산을 사용하여 관리, 보존, 경비가 되도록 법적인 근거를 마련했다.
따라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무덤은 앞으로도 국립묘지 대우를 받으며 관리될 것이 확실해졌다.
선거철이 되면 민주당계 정당, 특히 친노 성향의 정치인들이 자주 찾아오기도 한다.
민주당계 내의 동교동계나 보수정당의 일부 정치인들도 이따금씩 찾아오는 편이다.

 

5. 다른 정치인과의 사이

 

 

 

5.1. 친노

 

왼쪽에서부터, 정세균, 이해찬, 한명숙, 문재인, 이병완, 이광재가 보이며 그 뒤로 또 다른 참모진들이 앉아있다.
노무현을 따르는 인사들의 계파를 일컫는 말.
노무현이 초선 의원이던 시절부터 형성되었던 계파이며, 2002년 노풍을 필두로 한 제16대 대통령 선거와 2004년 탄핵 사건 등으로 인한 열린우리당의 과반 의석 차지 등 2000년대 초~중반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2006년부터 참여정부 심판론이 시작되며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의 인기가 바닥을 쳤고, 결국 2007년 12월 정권 재창출에 실패하며 친노는 정치계파에서 완전히 비주류로 전락하고 만다.
한때 폐족이라 자칭하며 몰락 위기에 놓이기도 했으나 노무현 사망 이후 세력이 확대되어 현재 한국 정치의 지형을 담당하고 있다.
주로 진보 내지는 개혁세력으로 평가되는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반대파 세력들을 소위 '비노'라고 칭하기도 한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부터 보좌하던 인사들을 지칭하지만 범용적으로 그의 정치신념을 따르는 무리까지 포섭하기도 한다.
일각에서는 이익집단의 성격을 띈 친박 내지는 친이와는 다르게 이념 집단의 성격을 띄고 있어 더 오래 간다는 평가도 있다.
주요 인사로는 원조 친노인 문재인, 이광재, 안희정, 이호철, 천호선, 서갑원과 참여정부 시기의 문희상, 김근태, 김두관, 김진표, 유시민, 이해찬, 한명숙 등이 있다.
과거에는 친노였지만 현재는 아닌 인사로는 정동영, 김한길, 천정배, 김병준, 조경태 등을 꼽을 수 있다.
대체로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에 이사나 위원으로 자리잡고 있는 사람이 많다.
유시민 또한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역임한 바 있다.
최근 들어서는 새로운 색채를 띈 문재인의 친문이나 안희정계 등으로 분화되면서 사용빈도가 줄어들고 있는 편이다.
친노 또한 문재인의 대통령 취임 이후 사실상 해체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친노 문서로.

 

5.2. 김영삼

 

김영삼은 평소에 인재 욕심이 많아서 손학규, 이회창, 이인제, 이명박, 이재오, 안희정, 이광재 등 여러 인재들을 천거했는데 노무현 역시 김영삼의 제의로 정계에 처음 입문했다.
제5공화국 시절 내내 인권변호사로서 명성을 얻어온 노무현을 알아본 김영삼은 그에게 정계 입문을 제안했고 노무현이 이를 받아들여 통일민주당 소속으로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때 부산 동구에 통일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그러나 1990년, 자신을 정치의 길로 인도했던 김영삼이 노태우 및 김종필과 3당 합당을 선언하자 노무현은 그의 행동을 야합으로 보고 김상현, 김광일, 장석화, 김정길과 함께 합당 발표 직후부터 격렬하게 반발하였고, 끝까지 소신을 지켰다.
또한 당시의 야당에서 김영삼, 김대중의 바로 다음 급이었던 이기택 부총재는 오랜시간 고민하다가 결국 합당 거부로 마음을 정하고 앞의 통일민주당 내의 합당 거부파 의원들과 당시 무소속이었던 이철, 박찬종과 민주당을 창당하였다.
이 1990년의 민주당은 당시 소속 국회의원이 이기택, 김광일, 장석화, 노무현, 김정길, 이철, 박찬종, 허탁 딱 8명에 불과했기에 언론에선 속칭 꼬마민주당이라고 불렸다.
이에 대해 김영삼도 심기가 불편해졌는지, 훗날 노무현이 자신의 라이벌이던 김대중의 후임으로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자 불편한 속내를 내보이기도 했고, "노무현은 내가 픽업했죠.
의리가 없어요.
평가 가치 없습니다"와 같은 악평을 상당수 남기기도 했다.
노무현은 이를 맞받아쳐 김영삼에 대해서 "87년 때까지는 DJ와 함께 훌륭한 분이었으나 3당 합당 이후 (기존 기득권 세력의) 인의 장벽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아쉬운 심정을 밝혔다.
이후 2000년대 들어 노무현이 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되면서 김영삼을 예방하고 서로 덕담을 나누는 등 사이가 다시 복원되는 듯했으나, 이 때 노무현이 예전에 김영삼으로부터 선물 받은 시계를 내보이며 '이 시계만 보면 지금도 총재님 생각이 난다'는 등 옛정을 언급했다가 호남 지지층으로부터 역풍이 불고 지지율이 떨어지자, 김영삼 전 대통령을 예방한 것 때문에 지지율이 떨어진 것 같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런 점도 있는 것 같다고 대답해 이를 듣고 화가 난 김영삼과 사이가 다시 틀어졌다고 한다.
이 때는 예전에 3당 합당 건에 대해서도 서로의 갈등도 풀고, 서로를 더 존중할 걸 그랬다라는 말까지 오고 갔었다.
 김영삼과 노무현 두 사람은 역대 대통령들 중에서 직설적인 화법으로 유명했지만 이것이 한동안 서로에게 철벽을 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한마디로 이 회동은 지지율은 지지율대로 떨어지고 김영삼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기만 한 최악의 한수가 되었다.
그러다가 2009년에 노무현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김영삼은 아직 앙심이 남아 있었는지, "노무현의 장례식을 국민장으로 치른 것은 이명박이 실수한 것이었다.
가족장으로도 충분했다"고 말했다.
잡지에 따르면, 김영삼은 이어 "내가 발탁해서 국회의원이 되었으니 그는 내게 빚이 있는데, 이렇게 돼 버려서 조금 실망했다"며 "나도 전직 대통령으로서 장례식에 참석했지만, 헌화할 꽃만 그냥 던져버리고 왔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김영삼의 비서실장인 김기수는 김영삼의 '가족장' 발언에 대해 "한국과 일본 모두 자살률이 높다는 기사가 나온 시점에서 각하는 '국가 지도자가 자살하면 후세를 위한 교육에 안 좋다'는 취지의 얘기를 먼저 했는데, 문맥이 거두절미되고 엉뚱한 얘기가 기사로 나간 것 같다"고 전했다며 해명했다.
다만, 김기수의 해명 또한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5.3. 김대중

 

민주당계 정당의 쌍벽 중 하나였지만 그들의 하위세력들은 서로 계파갈등을 당 내부에서 일으키다 훗날 새정치민주연합 분당사태를 거쳐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으로 갈라지게 된다.
DJ와 노무현의 만남은 YS가 노무현을 만났을 때 즈음이었는데, 5공 청문회에서의 강직하고 논리적으로 전두환과 재벌들에게 질문하는 것을 보고는 노무현을 우연히 국회 본청의 의원 식당에서 만난 DJ가 악수를 청하면서 건넨 말이 "잘했어요.
잘했어요.
"였다고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대중과 접점이 없던 노무현이 처음으로 대면했던 것이었다.
1990년에 일어난 3당 합당에 반대하여 민주당을 창당해 나왔던 노무현은 YS를 비판하며 뛰쳐나와 DJ 밑으로 후에 들어가긴 하나, 호남 기반의 세력들이 차지한 새천년민주당에서도 비주류였고, 정말로 김영삼이 하나회를 축출하고 전두환과 노태우를 구속시키면서 호랑이굴에서 호랑이를 잡겠다는 김영삼의 약속이 이루어지자, 당시에 YS를 비판했던 노무현은 입장이 난처해지며 YS와 DJ 세력 양쪽에서 배신자 소리를 들으며 찬밥 신세를 겪게된다.
노무현이 대선 후보로 떠오른 것도, 김대중 정권이 본인+ 세 아들들의 비리 및 국정원을 이용한 도청 등의 스캔들로 김대중 대통령의 지지율이 떨어지며, 동교동계가 호남을 제외하고 지지율을 잃을 때, 2002년 대선에서 민주당이 정권 유지를 할 수 있는 그나마 유일한 카드로 판별났었기 때문이었다.
경남 기반 YS 밑에 있었기에 호남 기반 DJ세력에게서 외면받으며 찬밥 자리였던 영남의 민주당 후보로 끊임없이 도전하다 바보 타이틀을 얻었던 것이 큰 이유였다.
2003년 노무현의 대통령 취임 이후 대북송금 사건이 터지자, 노무현은 한나라당이 주도한 특검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고 수용한다.
이에 동교동계의 반발이 거셌고, 대선 때 90%대의 압도적인 지지를 보낸 호남권의 민심도 부정적이었다.
다만 그 해 4월 22일 청와대에서 노무현 - 김대중의 부부 동반 오찬 회동이 있었고 이때 서로의 생각을 교환한 것으로 알려지는 등 직접적으로 반목할 지경까지는 아니었고, 이후 특검 연장을 노무현이 거부하면서 큰 갈등은 없었다.
그러나 이때를 계기로 동교동계와 친노 세력간에 분열의 씨앗이 생겼고, 훗날 천정배가 201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광주 서을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호남권 신당을 창당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동교동계 인사들이 "친노와 화합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한편 2003년 9월 새천년민주당에서 탈당한 친노 성향 의원과 한나라당의 옛 민주당계 의원 5명 등을 주축으로 열린우리당이 창당되었는데, 2004년 3월 12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에 새천년민주당까지 가세하자 김대중은 "탄핵 사태는 매우 심각한 일이다.
"라는 발언을 했고 이후 니혼게이자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는 "한국 정치가 변화할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는 발언을 하면서 사실상 열린우리당과 노무현의 편을 들었으며 노무현이 탄핵 기각으로 복귀하자 환영한다는 발언을 했다.
2009년 5월 23일 김대중은 독일 언론과 인터뷰를 진행중이었는데, 그 날 새벽 노무현이 자살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다.
라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심지어 장례식 때 자신이 직접 쓴 추도사를 낭독하려 했지만 정부의 사실상 거부로 대신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책의 추천사로 갈음했다.
뿐만 아니라 몸이 쇠약해졌는데도 휠체어를 타면서까지 분향소에 조문을 가고, 영결식 당일에는 비서의 부축까지 받아가며 끝끝내 헌화까지 스스로 한 뒤 권양숙 여사를 비롯한 유가족들과 악수하며 오열하는 모습도 보였다.
정치적으로는 가깝고도 먼 사이었지만, 사적으로는 노무현을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여담으로 이때부터 김대중의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되기 시작하였고, 결국 노무현이 사망한지 3개월만에 김대중도 세상을 떠났다.

 

5.4. 이명박

 

노무현과 이명박의 만남은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때 종로에서 맞붙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선거에서 이명박이 간신히 이겼지만, 이후 이명박이 의원직을 사퇴하면서 여기에 열린 재보궐선거에서 노무현이 당선된다.
그 후 노 전 대통령은 당시를 회상하며 "내가 대통령이 되는 것도, 그가 그 다음 대통령이 되는 것도 당시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라고 말했다.
이명박의 기사회생은 국민의 정부에서 이뤄졌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2000년 8·15 광복절 대사면을 단행하면서 MB의 피선거권이 회복된 이후 2002년 제16대 대선 직전 치러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청계천 복원사업과 버스노선 개편을 단행한 것도 이 재임 시기다.
같은 해 대선에서는 노란풍선 열풍을 일으킨 노 전 대통령이 민주 정부 2기 시대를 열었다.
종로에서 맞붙었던 경쟁자가 대통령과 서울시장으로 만난 셈이다.
이들은 이때부터 굵직굵직한 현안을 놓고 사사건건 부딪쳤다.
대표적인 게 행정수도 이전이다.
이는 노 전 대통령 핵심 공약이었다.
노 전 대통령 스스로 충청권으로의 수도 이전과 관련, “행정수도로 재미 좀 봤다”고 했다.
MB는 행정수도 이전 반대 최전선에 섰다.
MB는 당시 노무현 정부를 “잠시 왔다가는 5년 임기의 정권”이라고 폄훼한 뒤 “수도 이전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라고 국민투표를 주장했다.
헌법재판소는 2004년 10월 ‘신행정 수도의 건설을 위한 특별 조치법’의 위헌확인 심판 소송에서 ‘관습 헌법’ 논리를 들면서 국민투표 없는 행정수도 이전은 위헌으로 판결했다.
 부동산 가격 폭등을 비롯해 경제 문제를 놓고도 대립했다.
참여정부 시절 ‘버블세븐’(서울 강남·서초·송파·목동, 경기 분당·용인·평촌)을 중심으로 집값이 폭등하자 MB는 참여정부 경제정책에 대해 “서민경제가 죽어가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하면서 강북 뉴타운을 내걸고 표심 잡기에 들어갔다.
보수진영의 ‘세금 폭탄론’에 휘청거린 노 전 대통령은 진보진영으로부터 부동산 원가공개 등의 요구를 받았지만, “자본주의하에는 열배남는 장사도 있다.
”고 일축, 탄핵 역풍으로 80% 이상이었던 지지율이 순식간에 40% 이하로 떨어지게 된다.
그 후 다시는 40% 지지율 근처에도 못가게 된다.
임기 내내 온갖 구설수와 정책실패, 대연정 등의 헛발질만 거듭한 끝에 노 전 대통령은 민주진보 10년 권력을 MB에게 내줬다.
MB는 2007년 대선에서 48.
7%의 득표율을 기록, 26.
1%에 그친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를 크게 앞섰다.
노 전 대통령과 MB의 관계가 앙숙관계로 치달은 것도 이때부터다.
MB가 당선인 신분으로 현직 대통령인 노무현 대통령과 회담할 때만 해도 분위기는 험하지 않았다.
허나, 2008년 퇴임 후 KTX를 타고 봉하마을로 내려간 노 전 대통령은 한때 친환경 벼농사 농법 전도사를 자처했지만, 2009년 박연차 게이트로 직격탄을 맞았다.
노 전 대통령은 자서전 <운명이다>에서 “그는 취임하자마자 임기가 남은 공공기관, 공기업 기관장들을 몰아냈다.
마침내 나를 겨냥한 공격을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문 대통령도 자서전 <운명>에서 “정치보복의 시작은 참여정부 사람들에 대한 치졸한 뒷조사였다”며 “노 전 대통령은 나와 친분 있는 많이 기업이, 심지어 내가 자주 가던 식당도 세무조사를 당했다”고 말했다.
당시 정치권 안팎에선 MB가 노 전 대통령과 가까운 ‘우리들병원’, ‘토속촌’, ‘제피로스’ 등에 대해 전방위적인 세무조사를 벌였지만, 별다른 의혹이 나오지 않자 ‘태광실업’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말이 파다했다.
여권 내부에서 ‘박연차 게이트’를 놓고 표적 세무조사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검찰이 노무현의 비리를 조사할때 노무현과 술자리를 가졌던 사람들과 악수한번 했던 편의점 점장 등 노무현과 한번이라도 엮인 민간인을 상대로 검찰조사를 하여 노무현에게 압박을 주었다.
그 결과 실제로 수많은 측근과 가족들이 비리에 연루되어 있었으며 검찰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노무현은 결국 2009년 5월 23일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사망했다.
피의자인 노무현의 자살로 기소가 불가능해진 검찰은 '공소권 없음'으로 사건을 종결지었다.
범죄의 성립 여부를 판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혐의 처분과는 다르다.
노무현 본인이 뇌물을 받았는지의 여부는 결국 밝혀지지 않았다.
이후 문재인 정부에 들어서 박근혜 정부의 비리들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그에 연계되어 MB의 과거의 범죄 행각들이 서서히 드러남에 따라 검찰의 칼끝이 이명박의 턱밑까지 왔으며, 18년 3월 14일에 검찰 출석을 하고 급기야 23일에는 구속되었다.
2년 반의 재판 끝에 대법원에서 2020년 10월 29일 징역 17년형이 최종 확정되었다.

 

6. 어록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미래입니다.
"- 2007.
6.
16.
노사모 총회 축하 메시지"대통령을 욕하는 것은, 민주 사회에서 주권을 가진 시민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대통령을 욕함으로써 주권자가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다면, 저는 기쁜 마음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 재임 중 자신에게 대한 악성 댓글에 대해 남긴 말"정의가 무너진 사회에서는 어떠한 번영도 있을 수 없다"- 검찰개혁 연설 中"강물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 2008년 4월 25일 방명록에서.
“오늘 밤이 지나면 우리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납니다.
성별, 학력, 지역에 차별 없이 모두가 자신의 꿈을 이루어 가는 세상.
어느 꿈은 이미 현실이 되었고 어느 꿈은 아직 땀을 더 쏟아야 할 것입니다.
정치가 썩었다고 고개를 돌리지 마십시오.
낡은 정치를 새로운 정치로 바꾸는 힘은 국민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아직 지지 후보를 정하지 못하셨다면, 우리 아이들이 커서 살아가야 할 세상을 그려보세요.
행복한 변화가 시작됩니다.
이회창, 권영길 후보님.
수고 하셨습니다.
국민 여러분 고맙습니다.
기호 2번 노무현입니다.
”제16대 대통령 선거 당시 광고 ‘노무현의 편지’"사람은 소통하며 살아야 한다.
지배하는 사람도 있고, 지배 받는 사람도 있는데, 내 희망은 이 차이가 작기 바란다.
지배하는 사람과 지배 받는 사람 사이에 가장 큰 단절은 소통이 안되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 자와 국민이 소통해야 한다.
"- 2006.
8.
28.
경복궁 신무문 개방행사 中국민 여러분! 독도는 우리 땅입니다.
그냥 우리 땅이 아니라 40년 통한의 역사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는 역사의 땅 입니다.
(중략) 독도를 분쟁 지역화하려는 일본의 의도를 우려하는 경해가 없지는 않으나, 우리에게 독도는 단순히 조그만 섬에 대한 영유권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과의 관계에서 잘못된 역사의 청산과 완전한 주권 확립을 상징하는 문제입니다.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대처해 나가야 할 일입니다.
독도 문제를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와 더불어 한일 양국의 과거사 청산과 역사의식, 자주 독립의 역사와 주권 수호 차원에서 다루어야 합니다.
- 2006.
4.
25.
한일관계에 관한 특별담화문북한은 핵과 미사일을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억제수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북한의 말은 믿기 어렵지만 이 문제에 관해서는 북한의 주장은 여러 가지 상황에 비추어 일리가 있는 측면이 있다고 본다.
- 2004년 11월 13일 LA연설 中자랑스러운 역사든 부끄러운 역사든, 역사는 있는 그대로 밝히고 정리해 나가야 합니다.
특히 국가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잘못은 반드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또한 용서와 화해를 말하기 전에 억울하게 고통 받은 분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명예를 회복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국가가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이자 의무입니다.
- 2006.
4.
3.
제주 4.
3 사건 희생자 위령제 추도사국민들과 눈높이를 맞추는 지도자가 되겠습니다.
경호원 한두 명과 남대문 시장에, 자갈치 시장에, 동성로에, 금남로에, 은행동 거리에 모습을 나타내는 대통령, 거기서 마주친 시민들과 소주 한 잔을 기울일 수 있는 대통령, 그런 친구 같은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 2002.
4.
27.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문“음모론, 색깔론 그리고 근거 없는 모략 이제 중단해 주십시오.
한나라당과 조선일보가 합창해서 입을 맞추어서 저를 헐뜯는 것을 방어하기도 참 힘이 듭니다.
제 장인은 좌익 활동을 하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해방되는 해에 실명을 하셔서 앞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무슨 일을 얼마나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결혼하기 훨씬 전에 돌아가셨는데, 저는 이 사실을 알고 아내와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 잘 키우고 지금까지 서로 사랑하면서 잘 살고 있습니다.
뭐가 잘못됐습니까? 이런 아내를 제가 버려야 합니까? 그렇게 하면 대통령 자격 있고, 이 아내를 그대로 사랑하면 대통령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까? 여러분,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께서 심판해주십시오.
여러분이 그런 아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신다면 저 대통령 후보 그만두겠습니다.
여러분이 하라고 하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 "언론 국유화, 과거에도 생각해본 일 없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 없습니다.
어느 언론사를 대통령이 폐간할 수 없습니다.
그런 생각 해본 일이 없습니다.
대통령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국유화, 폐간, 어떤 대통령도 할 수 없는 일인데 감히 제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한다는 것입니까?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가지고 사람을 이렇게 모략해선 안됩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제게 언론사 소유지분 제한의 견해를 포기하라고 압력을 가해왔지만, 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략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언론을 권력으로서 어떻게 흔들 생각도 없지만, 그러나, 언론에게 고개를 숙이고 비굴하게 굴복하는 정치인은 되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맞서 싸울 것입니다.
도와주십시오! 제게 힘을 주십시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민주당 경선에서 손을 떼십시오!"- 2002.
4.
6.
새천년민주당 인천지역 국민경선 연설문지금 정상문 전 비서관이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은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정 비서관이 자신이 한 일로 진술하지 않았는지 걱정입니다.
그 혐의는 정 비서관의 것이 아니고 저희들의 것입니다.
저의 집에서 부탁하고 그 돈을 받아서 사용한 것입니다.
미처 갚지 못한 빚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2009.
4.
7 수뢰혐의에 대한 사과문 中조선 건국 이래로 600년 동안 우리는 권력에 맞서서 권력을 한 번도 바꾸어 보지 못했다.
비록 그것이 정의라 할지라도 비록 그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권력이 싫어하는 말을 했던 사람은 또는 진리를 내세워서 권력에 저항했던 사람들은 전부 죽임을 당했다.
그 자손들까지 멸문지화를 당했다.
패가망신했다.
600년 동안 한국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권력에 줄을 서서 손바닥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그저 밥이나 먹고살고 싶으면 세상에서 어떤 부정이 저질러져도 어떤 불의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 척하고 고개 숙이고 외면했어야 됐어요.
눈 감고 귀를 막고 비굴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목숨을 부지하면서 밥이라도 먹고 살 수 있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제 어머니가 제게 남겨 주었던 제 가훈은 "야 이 놈아.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눈치 보며 살아라.
" 80년대, 시위하다가 감옥 간 우리의.
정의롭고 혈기 넘치는 우리 젊은 아이들에게 그 어머니들이 간곡히 간곡히 타일렀던 그들의 가훈 역시 "야 이 놈아.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고만 둬라.
너는 뒤로 빠져라.
"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이 역사를 청산해야 합니다.
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권력을 한 번 쟁취하는 우리의 역사가 이루어져야만이 이제 비로소 우리의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얘기할 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2001.
12.
10.
제16대 대통령 민주당후보 국민경선 출마 연설문 "광주에서 콩이면 부산에서도 콩이고, 대구에서도 콩인 옳고 그름을 중심으로 해서 인물과 정책을 중심으로 해서 그렇게 정치를 해나갈 수 있는, 그래서 국민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를 이 노무현이 열겠습니다.
"- 2000.
4.
1.
16대 총선 거리유세 中"결코 굽히지 않는, 결코 굴복하지 않는, 결코 타협하지 않는 살아있는 영혼이! 깨끗한 영혼을 가지고, 이 정치판에서 살아남는 증거를 여러분들에게 보여줌으로 해서, 우리 아이들에게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다는 하나의 증거를 꼭 남기고 싶었습니다.
"- 1995년 부산시장 선거 연설 中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더불어 사는 사람 모두가 먹는 것 입는 것 이런 걱정 좀 안하고 더럽고 아니꼬운 꼬라지 좀 안보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좀 신명나게 이어지는 그런 세상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만일 이런 세상이 좀 지나친 욕심이라면 적어도 살기가 힘이 들어서 아니면 분하고 서러워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그런 일은 좀 없는 세상 이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옛날에는 생활고로 일가족이 집단 자살하는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일은 거의 없는 것 같은데 그런데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은 늘어만 갑니다.
(중략) 월남전 생각이 납니다.
월남전에 대해서 온 세계가 비난을 하고 있었을 때 정부는 슬그머니 여론을 이렇게 조성했습니다.
월남전에 참여해서 벌어온 돈으로 우리 경제가 발전되었노라고.
이렇게 사람을 속이려 했습니다.
이런 발상이야 말로 돈이면 무슨 짓이든 다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나라 백성 몇만 명 죽일 수 있다는 끔찍한 발상입니다.
저는 이렇게 묻겠습니다.
그런 발상을 가진 사람들에게 파이를 크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니네들 자식 데려다가 죽이란 말이야! 춥고 배고프고 힘없는 노동자들 말고, 바로 당신들 자식 데려다가 현장에서 죽이면서 이 나라 경제를 발전시킵시다!- 1988.
7.
8.
제 142회 임시국회 대정부질의 中"대통령이 다 모든 것을 다 양보하고 할 수도 없고, 그래서 이렇게 하다가는 대통령직을 못해먹겠다는 생각이, 그 위기감이 생깁니다.
"- 2003년 5월 21일 5.
18 행사추진위 간부 접견 中 영상노무현: 노무현의 시대가 오겠어요?유시민: 아, 오지요.
100% 오지요.
그거는 반드시 올 수밖에 없죠.
노무현: 아, 근데 그런 시대가 오면 나는 없을 것 같아요.
(중략)유시민: 근데 가시고 싶은 데까지 못 가실 수도 있죠.
그런데 언젠가는 사람들이 거기까지 갈 거예요.
그렇게 되기만 하면야 뭐 후보님이 거기 계시든 안 계시든 상관있나요?노무현: 하긴 그래요.
그런 세상이 되기만 하면 되지, 내가 꼭 거기 있어야 되는 건 아니니까.
- 2002년 대선후보 시절 노무현이 유시민과 나눈 대화대우건설의 사장처럼 좋은 학교 나오시고 크게 성공하신 분들이 시골에 있는 별볼일 없는 사람에게 가서 머리 조아리고 돈 주고 그런 일 이제는 없었으면 좋겠다.
2004.
3.
11 TV 생중계 기자회견 중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사망 직전에 작성한 유서 中.

 

6.1. 제16대 대통령 취임사

 

 

7. 저서

 

  • <노무현이 만난 링컨>, 학고재, 2001년 11월 30일
  • <노무현: 상식, 혹은 희망>, 행복한책읽기, 2002년 3월 5일,
  • <여보, 나좀 도와줘>, 새터, 2002년 4월 17일 , 개정판
  • <노무현의 리더십 이야기: 행정가와 CEO를 위한 리더십의 8가지 원리>, 행복한책읽기, 2002년 10월 15일 , 개정판
  • 공저, <마음 먹었을 때 시작해라>, 고시계사, 2007년 6월 1일,
  • <진보의 미래>, 동녘, 2009년 11월 27일 , 개정판
  • <성공과 좌절: 노무현 대통령 못 다 쓴 회고록>, 학고재, 2009년 9월 22일
  • 노무현재단 엮음, 유시민 정리, <운명이다: 노무현 자서전>, 돌베개, 2010년 4월 26일
  • 공저, 김경수 엮음, <봉하일기: 그곳에 가면 노무현이 있다>, 부키, 2012년 1월 12일

 

8. 가족 관계

 

  • 아버지 노판석 (1900 ~ 1976) / 어머니 이순례 (1914 ~ 1998)누나 노명자 (1928 ~ 2013)큰형 노영현 (1934 ~ 1973)누나 노영옥 (1938 ~ )작은형 노건평 (1942 ~ ) / 妻 민미영본인 노무현 / 妻 권양숙 (1948 ~ )아들 노건호 (1973 ~ ) / 妻 배정민 (1976 ~ )손녀 노서은 (2004 ~ )손자 노하진 (2008 ~ )손녀 노영진딸 노정연 (1975 ~ ) / 夫 곽상언 (1971 ~ )외손녀 2명외손자 1명
  • 누나 노명자 (1928 ~ 2013)
  • 큰형 노영현 (1934 ~ 1973)
  • 누나 노영옥 (1938 ~ )
  • 작은형 노건평 (1942 ~ ) / 妻 민미영
  • 본인 노무현 / 妻 권양숙 (1948 ~ )아들 노건호 (1973 ~ ) / 妻 배정민 (1976 ~ )손녀 노서은 (2004 ~ )손자 노하진 (2008 ~ )손녀 노영진딸 노정연 (1975 ~ ) / 夫 곽상언 (1971 ~ )외손녀 2명외손자 1명
  • 아들 노건호 (1973 ~ ) / 妻 배정민 (1976 ~ )손녀 노서은 (2004 ~ )손자 노하진 (2008 ~ )손녀 노영진
  • 손녀 노서은 (2004 ~ )
  • 손자 노하진 (2008 ~ )
  • 손녀 노영진
  • 딸 노정연 (1975 ~ ) / 夫 곽상언 (1971 ~ )외손녀 2명외손자 1명
  • 외손녀 2명
  • 외손자 1명

 

9.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통일민주당
53,075 (51.00%)
당선 (1위)
초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민주당(1991년)
30,397 (32.25%)
낙선 (2위)
 
1995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부산광역시
647,297 (37.58%)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종로
통합민주당(1995년)
17,330 (17.66%)
낙선 (3위)
 
1998
7월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새정치국민회의
26,251 (54.44%)
당선 (1위)
재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북·강서 을
새천년민주당
27,136 (35.69%)
낙선 (2위)
 
2002
제16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12,014,277 (48.91%)
당선 (1위)
 

 

10.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통일민주당
1988 - 1990
정계 입문
무소속
1990
3당 합당에 대한 반발로 탈당
민주당(1990년)
1990 - 1991
창당
민주당(1991년)
1991 - 1995
합당
통합민주당(1995년)
1995 - 1997
합당
무소속
1997
새정치국민회의 입당을 위한 탈당
새정치국민회의
1997 - 2000
입당
새천년민주당
2000 - 2003
합당
무소속
2003 - 2004
신당 합류를 위해 탈당
열린우리당
2004 - 2007
입당
무소속
2007 - 2009
대통령 임기 말 탈당
정계 은퇴
사망

 

11. 대중 매체에서

 

노무현변호인 노무현변호인2
송강호가 연기한 노무현 (영화 변호인)

 

11.1. 사건

 

  • 부림사건
  • 노무현 명패 사건
  •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
  • 노무현 전 대통령 자살 사건
  • 일베저장소 합성사진 유통사건

 

11.2. 발언

 

  • 이쯤 가면 막 하자는 거지요
  •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이기야응딩이
  • 이기야
  • 응딩이
  • 제가 뭐 경제 살리겠다고 말이나 했습니까
  • 야 기분 좋다
  • 노무현의 시대가 오겠어요?

 

11.3. 기타

 

  • 대전지방법원
  •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 노무현은 안죽었다
  • 노사모
  • 노풍
  • 친노
  •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 꽃이 진 뒤에야 봄이었음을 압니다
  • 봉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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