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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춘 (다큐 영화/가수/촛불/박은옥 이혼/노래/북한강에서/떠나가는 배/시인의 마을/종로에서)

by Fact One 2022.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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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적 포크를 노래한 음유시인Mnet 레전드 아티스트 100에서의 소개문구모든 것을 떠나 과거 이름만을 먹고살지 않고 지속적으로 신보를 내고 있다는 것만으로 그는 국보급 포크 뮤지션이다.
우리한테 정태춘과 같은 '레알' 음악가가 있다는 것은 실로 행운이요, 축복이다.
ㅡ임진모가장 한국적인 보컬 아티스트로 대한민국의 원로 가수이자 사회 운동가, 싱어송라이터.
시인.
가요계를 논할 때 절대 빠져서는 안 되는 원로가수 중 한 명이다.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인 가요계의 거물.
조용필과 같은 올드 가수들과 더불어 지금도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가수 중 하나이자, 사전심의 폐지운동을 주도하여 승리를 이끌어낸, 한국 가요계에서 음악의 사회참여적 측면에서는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한 인물.
또한 음악적 측면에서도 예전의 뭇 가수들과는 판이하게 다르게 한국적인 멋이 듬뿍 들어간 노래와 서정적인 가사가 일품인 노래를 통해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는 노래를 만들었다.
지금도 정태춘을 '정태춘 선생님’, '정태춘 옹'이라고 높여 부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하나만으로 주변으로부터 얼마나 존경을 받는 인물인지 지레 짐작할 수 있다.
배우자는 박은옥(1957년생)으로, 이쪽도 가수이자 사회 운동가로 불교 신자다.
'뮤지션 그리고 투사' 정태춘.

 

2. 생애 및 디스코그래피

 

 

 

2.1. 출생 및 성장기

 

1954년 3월, 경기도 평택에서 평범한 농사꾼의 5남 3녀 중 하나로 태어났다.
포털사이트의 인물정보를 포함한 각종 공식 프로필에는 1954년 10월 10일생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당대 흔했던 늦은 출생신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출생하여 자랐던 평택의 도두리(棹頭里)는 경기도와 충청도의 경계에 위치한 곳으로 이 마을 사람들이 주로 왕래하던 장은 충청남도 아산시(당시 아산군) 둔포(屯浦)면에 위치한 장이었다고 한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의 성장기를 모두 이곳에서 보냈으므로, 이 성장기의 환경은 이후 그의 정서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평범한 시골의 가정이었지만, 악기를 접하고 취미로 삼을 수 있을 정도였던 것으로 보아 아주 빈농의 가정형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생활에서 음악을 접하게 된 것은 국민학교 5학년 때로, 미군부대를 다니던 큰매형이 가지고 온 기타 때문이었다고 한다.
무료한 농촌 생활이니만큰 그와 그의 셋째 형은 틈만 나면 이 기타를 붙잡고 놀았는데, 얼마나 가지고 놀았으면 한 번 들은 노래의 멜로디를 기타로 연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는 상태로 긴 시간 동안 많은 빈도로 악기를 가지고 놀아본 이들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코드나 주법의 체계적인 방법은 모르지만, 어찌어찌하면 이러한 멜로디를 연주할 수 있다라는 걸 체득하는 건 불가능한 건 아니다.
이걸 가지고 천재적인 재능을 어렸을 때부터 지녔느니 하는 건 오버일 수도 있다.
심지어 모차르트마저 타고난 천재가 아니라 그 아버지의 강요로 인한 피나는 연습 끝에 체화된 음악적 능력에 기반한 음악가라고 할 수도 있다.
여하튼 이 기타로 인해 음악에 높은 관심을 가지게 되고, 평택중학교 때 바이올린을 본격적으로 배우게 된다.
악기와 본인의 궁합이 매우 좋았던 것으로 보여 평택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도 바이올린을 계속 하며 음대에 진학할 꿈을 가지게 된다.
판단할 요소가 많진 않지만, 당시 정태춘의 모습은 소박한 시골에서 바이올린을 사랑하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학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내성적인 소년이 맞이한 첫 번째 시련은 고등학교 2학년 시절 그가 바이올린을 배우고 연주할 수 있었던 학교의 현악반이 밴드부로 통합된 것이었다.
당연히 밴드부에서 현악기의 존재는 유명무실한 것으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고자 했던 그가 느꼈던 절망감은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인다.
고등학교 이후의 진로가 통채로 날아가버린 암담한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앞날이 불투명한 시골 청소년들의 루트인 무리지어 몰려 다니기, 흡연, 외박 등이었다.
비록 내성적인 바이올리니스트 희망 학생에서 시골의 불량 잉여로 전락해 버린 그였지만, 이 시기에도 버스에 낀 성에를 갖고 시를 지어 보일 만큼 감수성 하나만큼은 다른 잉여들과 다른 점이었다고 한다.
당연히 대학진학은 실패.
하지만 앞서 언급되었듯이 찢어지게 가난한 형편은 아니었고, 자식이 하고 싶은 일을 타의에 의해 좌절당해 방황하는 것을 보기 안스러웠는지 집안에서는 당시로서는 거금인 30만원 가량의 바이올린까지 사서 그를 셋째 형이 있는 서울로 그를 보내어 을지로 3가에 있었던 서울음대에 레슨까지 받게 하며 재수생활을 하게 한다.
하지만 당시 그의 정신적, 심리적 상황은 외모에 대한 자학적인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는데다가 잘 알지도 모르면서 헤르만 헤세와 쇼펜하우어를 탐독하고 죽음에 대해 항상 생각하면서 자신이 직접 제조한 독약을 항상 품에 품고 다니는 등 뒤늦게 찾아온 중2병(.
)에 쩔어 있는 상태였다.
그는 입시 직전이던 1972년 10월 소위 10월 유신이 발표되자마자 재수생활을 때려치고 귀향하는데, 이는 딱히 확고한 정치적, 사회적 신념에 찬 결의였다기 보다는 자신과 세상에 대한 염세적 자세가 임계점을 넘나들던 가운데 발생한 사회적 이슈가 발화점이 된 것뿐이라고 할 수 있다.
가난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물심양면으로 신경써서 보냈던 어린 자식이 무작정 짐싸들고 집으로 돌아오니 집안에서 반겨줄 리가 만무한 상황에서 그는 몇 번씩이나 무작정 집을 나가 전국을 방황하거나 목욕탕의 화부로 일을 하는 등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는 고행을 한다.
다만, 이러한 경험은 당시에는 별다른 목적이 없는 그저 방황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 시기에 그에게 축적된 감수성, 혹은 내재적인 사고들은 그의 음악적 세계에 중요한 기반을 마련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던 도중 그는 입대를 하게 되고, 군생활 가운데 그의 초기작들을 작곡하게 된다.
어찌보면 외적인 방황이 제한된 군생활이 그에게는 오히려 내재된 정서를 정리하여 음악으로 표출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제대한 1978년 6월, 그는 이전부터 알고 지냈던 음악평론가 최경식의 소개로 서라벌 레코드와 인연을 맺어 군생활 동안 정리한 곡들을 처음으로 음반으로 만들어 발표하게 된다.

 

2.2. 데뷔 - 시인의 마을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

66위
1998년

 

2.3. 고난과 방황의 시기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두 번째 음반을 준비하게 되는데, 첫 음반의 성공을 지켜본 서라벌 레코드는 그에게 선곡의 권한을 준다.
하지만, 이것은 적어도 대중적 성공에 있어서는 패착이었다.
정태춘 2집, 사랑과 인생과 영원의 시정태춘의 2집은 음악적 수준 그 자체로는 실패작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대중적으로는 실패작이었다.
'사망부가'나 '탁발승의 새벽노래' 등의 수록곡은 그가 가지고 있었던 정서적인 특색이 더욱 강조되고 깊이가 있는 것이었으나 대중적이지는 않았다.
더구나 방송국 관계자들에게는 뻣뻣하고 싸가지 없으며 어딘가 불순한 놈으로 인식된 상황에서 음반의 성공은 요원한 일이었다.
정태춘 3집, 우네2집의 실패에 이어 3집의 결과는 더욱 비참했고 시장에 음반이 제대로 깔리지도 못하게 된다.
3집의 노래들 역시 정태춘 특유의 정서는 더욱 강조되었고, 반주 중 상당수를 국악으로 하는 등 실험적인 요소도 많았던 음반이다.
하지만, 결과는 대 실패.
연이은 음반의 실패로 말미암아 그는 경제적으로도 꽤나 궁지에 몰리게 된다.
저작권에 따른 수입 체계나 음반 유통의 정확한 통계에 따른 인세 개념이 희박했던 당시 대중음악인들의 수입 체계는 꽤나 허술해서, 레코드사에서 계약금조로 주는 돈에다가 월급조로 주어지는 생활비가 일종의 음반과 공연에 대한 정산이었던 셈인데, 이 시기 이러한 생활비 지급이 중단된다.
음반사의 경영난이라는 핑계가 따라왔지만 그야말로 핑계일 뿐, 누가 봐도 저조한 흥행에 대한 당연한 댓가였다.
1980년대 초반의 이 시기는 그의 음악활동 기간 중 가장 방황이 심했던 시기였다.
연이은 음반의 실패로 인한 경제적 곤궁함, 결혼을 하고 자녀까지 낳아 기르는 상황에서 안정적인 생활에 대한 갈망과 동시에 '연예인'이 아닌 음악가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등으로 괴로운 나날을 보낸다.
이 때 손을 내민 것은 당시 메이저 레코드사 중 하나였던 지구레코드.
지구레코드가 제시한 조건은 4년 전속 계약으로 800만원이었다.

 

2.4. 복귀, 그리고 개안(開眼)의 시작

 

이 계약으로 인해 1984년 4번째 음반인 '떠나가는 배'가 발매된다.
이때부터 그의 음반은 정태춘이 아니라 '정태춘, 박은옥'의 부부 듀엣의 이름으로 발매된다.
정태춘, 박은옥, 떠나가는 배타이틀 곡 '떠나가는 배'이 4번째 음반은 나름대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다.
비록 방송 출연 등의 활동은 하지 않았지만 곤궁한 이전 시절의 경제적 고난은 겪지 않았어도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정확한 판매량 측정에 따른 인세 개념은 없었던 시기였지만 음반사로부터 계약금 외의 수입이 발생하여 가계에 도움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1985년 연이어 발매된 '북한강에서' 역시 나름대로의 대중적 성공을 거둔다.
정태춘, 박은옥, 북한강에서타이틀 곡 '북한강에서'비록 대중음악인으로서,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회생했지만 그가 가졌던 고민과 의문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그의 내면에 남아있었다.
그는 이러한 고민과 의문을 풀어나가는 방향으로 전국적인 공연을 시작한다.
그의 전국 공연은 현재와 같은 소위 '콘서트'의 형태는 아니었다.
그는 대규모 공연 스탭과 물량을 동원할 수준의 가수는 아니었고, 1985년 1월 부산 카톨릭회관에서 시작되어 전국 방방곡곡으로 이어진 그의 공연은 대부분 소극장 내지 대학의 강당 수준에서 벌어지는 공연이었다.
다만, 이는 어떠한 지향점을 가졌던 것이라기 보다는 그저 현실적인 형편에 의한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소규모의 공연은 그에게 하나의 전환점을 가져다 준다.
사실 그는 상당히 애매한 수준의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의문과 고민을 가지고 젊은 시절의 방황에 가까운 형태로 공연을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아러한 소규모의 공연장에서 대중과 가깝게 접촉하면서 이전과 대비하여 비교적 체계적인 형태의 '개안(開眼)'을 한 것이다.
정태춘, 박은옥 발췌곡집1987년, 그동안의 노래들을 정리한 발췌곡집 음반을 낸 후 1988년 연이어 6집 음반이라고 할 수 있는 '무진 새노래'를 발표한다.

 

2.5. 새 노래를 들고 광야로

 

정태춘, 박은옥, 무진 새 노래10번 트랙 '얘기2''무진 새 노래'에 실린 노래들은 공연을 통해서 실연된 노래들을 포함하고 있었고, 단순히 전통적 음악기법과 처연한 정서 중심이었던 기존 노래들과 달리 상대적으로 더 진지하고 구체적인 메시지들을 담고 있었다.
당연히 공윤과의 갈등은 더욱 깊어질 수 밖에 없었고 그는 이를 통해 무언가 구체적인 진로를 결정하게 된다.
사실, 이 음반은 당시 공윤의 기준으로는 발매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최고조에 달하던 시절이어서 가사 수정 명령에 그쳤다고 봐야 한다.
그는 1988년 겨울, 청계피복노조 주최의 작은 집회에 참가하여 노래를 부른 것을 시작으로 크고 작은 집회와 대학가의 초대 손님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1988년 12월부터 '송아지 송아지 누렁송아지'라는 공연을 시작한다.
http://bbs.
catholic.
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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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p?gubun=100&maingroup=2&filenm=101(27).
jpg'송아지 송아지 누렁송아지'는 단편적인 노래가 아닌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주제를 가진 노래극 형태의 공연이었고, 당시 제도권 대중음악계에서는 시도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당대 사회적인 시류, 특히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중들의 정서와 맞아떨어졌다는 것이다.
비록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인생과 음악생활을 통해 지속적으로 견지해 온 그의 음악적 특성은 당시의 대학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재발견의 노력, 혹은 서구, 특히 미국 중심의 대중문화에 대한 반발적인 정서와 적절하게 들어맞았다.
당시 전국의 모든 대학에는 소위 '제국주의 문화'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운동권과 연계된 탈춤, 풍물 동아리, 전통문화연구 동아리 등이 존재했었고 이들이 대학을 다니는 20대 초중반의 청년문화의 핵심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국을 돌며 벌어지는 정태춘의 공연은 입소문을 타고 온 대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다만, 정태춘의 입장에서 이러한 현상은 오히려 그들에 의해 자신이 눈을 뜨게 되는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음반을 발표하고 방송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만 대중을 만났던 그에게 젊은 대중들과 만나면서 그들이 이야기하는 세상의 이야기, 탁치니 억하고 죽은 이에 대한 이야기와 공연장 밖에서 날마다 휘날리는 매캐한 최루탄 냄새의 구체적인 이유 등을 듣게 되는 기회였던 셈이다.
1989년 4월까지 이어진 이 공연을 통해 그는 비로소 그의 음악적 지향점의 기초를 완성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진정한 노래를 위하여 공윤과의 힘겨운 싸움에 나서게 되는데.

 

2.6. 아, 대한민국... 그리고 검열과의 전쟁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

76위
1998년

 

2.7. 회한과 희망의 공존

 

정태춘, 박은옥, 정동진/건너간다6번 트랙 '건너간다'http://bbs.
catholic.
or.
kr/attbox/bbs/include/readImg.
asp?gubun=100&maingroup=2&filenm=u90120-5(27).
jpg정태춘, 박은옥,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타이틀곡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1998년 2월에 발매된 '건너간다'와 2002년 11월에 발매된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는 이전 앨범인 '92 장마, 종로에서'가 가지는 정서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그 '회한과 공존하는 희망'의 정서는 이전의 것과는 다소 다른 것이어서 단순히 민주화, 혹은 진보 세력의 패배에 의한 상실감과 그에 대한 극복이 아니라 당시 시대의 변화상에 따른 '회한과 희망'의 정서라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중후반의 한국사회는 또다른 의미에서 파란만장한 시기여서, 전두환과 노태우가 사형선고를 받았고 김일성이 사망했으며, 연세대 사태로 인해 대학 운동권이 그야말로 박살난 가운데 이미 대학생들은 취업을 통해 기존 기득권층에 편입되기만을 희망하는 존재들로 전락했다.
X세대라는 그 누구도 모를 용어로 정의되는 이들과 오렌지족들이 생겨났고 소비가 미덕인 시대로 급격하게 전환되는 가운데, 양극화의 극단적인 부작용으로 지존파가 등장하고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그리고 이러한 다이내믹한 변화들은 IMF 사태로 귀결되어 한바탕 쓰나미가 지나간 듯 한국 사회 전체를 휩쓸었다.
그러므로 그의 노래들에 나타나는 회한들은 더더욱 깊게 침잠되었다.
'92 장마, 종로에서'에 수록된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에 나오듯이 어두운 터널을 지나 차량기지 마저 지나쳐 희망의 시대로 나아가고자 했던 그의 정서는 '건너간다'에 이르러서는 '다음 정거장은 어디'인지도 모르고 '이 버스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그저 무표정하고 지친 이들을 싣고 '환멸의 90년대를 지나가'는 것으로 변화한다.
하지만 그 뒤에 오는 희망의 정서 또한 여전하여 그는 여전히 정동진에 떠오르는 '쌍무지개'와 '어둠 걷혀 깨는 새벽길 모퉁이를 돌아' '투명한 유리창 햇살 가득한 첫 차를 타고' 가는 것을 노래한다.
하지만, 그는 이 앨범을 끝으로 10년간 침묵하게 된다.

 

2.8. 침묵, 그리고 실향

 

정태춘은 제16대 대선을 1년여 앞둔 2001년 12월 발족한 '노문모(노무현을 지지하는 문화예술인 모임)'의 창립멤버로 참여하며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지만, 선거를 앞두고 탈퇴했고 고민 끝에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를 지지했다.
그는 노문모가 노무현이라는 후보 개인에 대한 지지만이 아니라, 그를 지원하고 견인할 어떤 세대의 세력화를 이루어내는 공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문건으로 제출했고 토론도 했지만 많은 공감을 얻지 못했고 결국 그곳을 탈퇴했다.
김대중 정권 즈음 부터 그는 신자유주의라는 세계사적 변화에 맞서는 거대 담론이 필요하다는 현실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90년대 이후 진보운동에서는 오히려 시민의 일상, 지역의 문제 같이 미시적인 것에만 집중하는 편향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권력은 국가에서 시민으로 넘어갔다'고 말했지만 그는 '권력은 국가에서 자본으로 넘어가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민주화가 신자유주의 자본화로 이어지는 상황에 대한 그의 정확한 현실 인식은 함께하던 사람들에게서 거의 공감을 얻지 못했고, 결국 2002년 이후 일체 음악 작업과 사회 활동을 중단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그는 경기도 평택의 미군기지 확장 반대투쟁, 소위 대추리 사태에 적극 참여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평택의 대추리 및 도두리 지역은 그가 나고 자란 고향이자 정신적, 음악적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고, 당시 평택 일대의 다수 농민들과 마찬가지로 금전으로 치환될 수 없는 무언가였다.
하지만 정부와 국회는 미군과의 협상 및 국회 비준을 일사천리로 진행했고, 주민들 다수의 동의도 없이 토지를 강제수용했으며 2006년 초가 되지 파종한 논밭을 포크레인을 동원하여 갈아 엎는 등의 행정집행을 강행했다.
2006년 5월 4일 새벽 4시 경찰 1만3천여명에 용역 직원 및 군병력까지 투입된 대추분교 철거 작전은 무자비하게 집행되었고 수백명의 부상자까지 속출시키는 그야말로 '사태'가 되었다.
정태춘은 이 사건의 중심에 있었고 그 역시 다른 주민들과 함께 극렬히 저항했으나 결국 경찰에 연행된다.
그는 노무현의 사망 후 각종 추모 집회의 공연과 마지막 추모 문화제인 '잘 가오, 그대'의 총연출을 맡아 이미 사자(死者)가 되어버린 이와 화해를 하고, 2009년 30주년 기념 공연 등을 하긴 했지만, 새로운 앨범은 더이상 없다는 태도를 취했다.

 

2.9. 시인의 귀환

 

정태춘, 박은옥,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1번 트랙 '서울역 이씨'2012년 1월, 근 10년의 침묵을 깨고 그의 새 앨범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가 발매되었다.
새로운 앨범을 내지 않으려는 그를 돌아세운 건 다름아닌 아내이자 음악 파트너인 박은옥.
그녀의 말에 따르면 만난 이후 거의 싸우는 일이 없었던 이 부부는 이 앨범의 제작을 설득하고 거부하는 과정에서 무수히 싸워댔다고 한다.
그리고 그를 돌아세운 건 세상에 무언가 의미를 던지는 것만이 아니라 시야를 좀 좁혀서 그저 담담하게 노래를 할 수도 있는 거 아니냐는 박은옥의 설득이었다.
이전 앨범에서 10년이나 세월이 지났지만, 발표된 그의 곡들은 여전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
물론 이미 환갑을 바라보는 그의 메시지는 이전과 비교해서 많이 유연해지기는 했지만, 음악적 측면에서는 오히려 더욱 더 날카롭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전에 비해 전반적인 사운드가 보다 차가워진 느낌을 주면서 그가 오랫동안 간직했던 전통적인 정서가 단순히 한국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제 3세계 음악까지 끌어안는 모습도 보여준다.
시작곡인 '서울역 이씨'에서는 여전히 낮은 인간 군상들에 대한 처연한 정서가 오히려 더욱 직설적으로 표현되고 있고, 신곡 중 마지막 곡인 '날자 오리배'에서는 암울한 현실을 박차고 날아올라 이상 세계를 향하는 모습이 표현되며, 마지막 곡이자 이 부부가 스스로에게 헌정하는 트랙인 '92 장마, 종로에서'는 이제는 환갑을 바라보는 부부가 다시 부르는 희망가라고 할 수 있다.

 

2.10. 2016년 11월 민중총궐기

 

2016년 11월 민중총궐기에서 오랜만에 공개석상에서 노래를 불렀다.

 

3. 총평

 

한국의 대중음악사와 사회운동사적으로 꽤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예술인이라고 할 수 있다.
정태춘을 높게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우선 서구음악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현재까지도 서구음악 중심인 대중음악계에서 한국의 고유한 정서를 내포한 음악적 정체성을 지키고 있는 대중음악가 중 한 명이라는 점이다.
물론 국악이나 사물놀이 등의 요소를 차용하여 활용한 사례는 무수히 많으며 굳이 정태춘이라는 음악가 혼자서 그러한 위계를 독점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정태춘의 경우 그의 음악에 축적된 전통적인 요소와 정서가 교육과 훈련을 통해 얻어진 것이 아니라 그의 출생과 성장, 인생과정을 거쳐 형성되고, 또한 그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뛰어든 여러 사회적 장면들을 통해 얻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단순한 크로스오버의 음악과는 차별되는 점이 있다.
또한 대중음악이라는 것이 당대의 사람들의 정서와 그들을 둘러싼 사회의 모습을 담아내는 것이라는 면에서 그의 음악은 당대의 사람들과 사회와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소통을 통해 만들어지고 향유된 것으로 음악사적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그의 음악이 끌어안은 정서는 언제나 주류가 아닌 소수 약자들의, 혹은 공공선을 지향하는 이들의 것이었고, 이와 유사한 것이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잘 찾아볼 수 없다는 희소성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
포크라는 장르가 단순히 통기타 반주로 행해지는 어쿠스틱 음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사회상과 소통하는 장르라는 점에서 그는 김민기와 한대수로 시작된 이래 이미 고인이 된 김광석과 더불어 한국 포크계열의 정당한 상속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안치환이나 류금신, 권진원처럼 민중가요의 영역에서 입지를 굳혀 기존가요로 진출을 시도한 예는 더러 있지만 촉망받는 기성 가요계의 신인이었다가 노래하는 투사로의 방향전환은 정태춘이 유일하다.
음악사적인 맥락에서 떼어놓고 보더라도 정태춘은 최고 수준의 가수 중 한 명으로 손꼽기에 부족함이 없다.
극도로 정제된 시적인 가사를 읊조리듯이, 푸념하듯이, 혹은 담담하게 소화하는 그의 가창력은 감수성을 담아낸다는 측면에서는 거의 비교할 대상이 없을 정도로 독보적이다.

 

4. 여담

 

  • 불교 신자로, 그의 곡들에서는 간간이 불교 용어들을 찾아볼 수 있다. 도솔천, 억겁, 중생, 해탈 등의 여러 불교 용어가 들어가 있다.
  • 슬하에 딸인 정새난슬(1981년생)이 있다. 일러스트레이터로 YB의 앨범 재킷 등을 디자인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2013년 4월 인디밴드 럭스의 리더인 원종희와 결혼했다가 2015년 이혼했다. 이혼 사유는 럭스의 전 기타리스트가 정태춘 씨를 빨갱이라고 비하한 사건부터 해서 럭스 주변에 극우적이며 정치적 의도가 섞인 비하 발언을 거침없이 하는 이들이 제법 있었음에도 전 남편 원종희는 개인적 친분을 고려한답시고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던 것이 이혼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 공연 때 가사를 의외로 많이 틀린다. 비하의 의미가 아니라 한 곡의 가사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긴 곡이 많고 반복되는 부분도 적어 외우기가 무지 힘들다. 그래서 공연 때 앞에 가사대를 두고 공연하는 경우가 많다. 시적 산문이라고 불러야 될 정도로 기나길면서도 어색하지 않고 한국어의 맛을 자연스럽게 살리고 있는 가사들을 구사하는 아티스트인만큼 당연한 이야기인지도. '한 여름 밤' 같은 서정적인 곡만을 거론하더라도 불필요하거나 어색한 어휘가 하나도 없는 아름다운 한글 가사로 멜로디와 어울리며 정서를 표현하는 심오한 경지를 엿볼 수 있다(!).
  • 사회적인 개안이 시작된 시기 이후로 발표하는 곡들의 가사에 열차나 버스 등의 대중교통수단과 그에 관련 장소가 자주 등장한다. '92년 장마, 종로에서'에 수록된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에서는 겹겹이 서로 몸부대끼며 어루만지는 민중들이 다함께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 차량기지까지 지나 찬란한 햇빛 세상으로 나아가는 지하철을 노래했고, '정동진/건너간다'에 수록된 '건너간다'에서는 검은 물결의 한강을 건너 다음 정거장은 어디인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며, 무너지는 교각들 하나둘 건너 환멸의 90년대를 지나가는 버스를,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의 타이틀 곡인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에서는 어둠 걷혀 깨는 새벽길 모퉁이를 돌아 투명한 유리창, 햇살 가득한 첫차를 타고 초록의 봄날 그 언덕길로 가는 것을 노래한다.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는 예술작품에서 대중교통을 민중들의 공동체로 묘사하는 경우는 다수 존재한다. 현대의 대중교통은 각기 목적지도 다르고 가고자 하는 방향도 다르고, 도중에 누군가 내리고 누군가 다시 탈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같은 공간에 있을 수 밖에 없는 장소라는 의미를 가지며, 이러한 특성 때문에 서민 중심의 민중의 공동체로 묘사되기도 하며, 역설적으로 군중 속의 소외, 혹은 집단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파편화된 현대 대중을 상징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 2019년 4월 19일 SBS 나이트라인 초대석에 출연하여 인터뷰했다. 영상
  • 힛트 음반이 2가지가 존재하는데 하나는 지구레코드 출시반으로 별다른 특징이 없는 모음집이다. 하지만 나머지 하나가 주목받았는데 그 이유가 가수가 직접 선별한 곡+순서를 직접 배치해서 화제였다. 정태춘 박은옥 부부의 20년간 발매한 앨범의 중요곡들이 다 들어있으니 사볼만하다.(가성비가 좋다.)'
  • 보통 음반들은 저작권단체,심의단체등등(음저협,공윤위등등)의 스티커(빤작이)가 붙어있지만 정태춘 박은옥 부부의 음반에는 정태춘ㆍ박은옥 스티커가 붙어있다. 예시로 바로위의 아, 대한민국...의 사진을 보자.
  • 충청남도 아산시와의 접경 지역인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출신이라 충청 방언이 약간 섞인 말투를 구사한다.
  • 이북 출신도 아닌데 실향민이다. 어린 시절 살던 마을이 미군기지 건설로 인해 철거되었기 때문.
  • 2021년 제13회 DMZ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특별상(DMZ특별공헌상)을 수상한 바 있는 다큐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이 2022년 5월 18일 전국 극장에서 개봉한다. 본 영화는 정태춘, 박은옥 선생의 음악 인생을 가장 심도 있게 다룬 뮤직 다큐멘터리이다.

 

5. 주요 곡 목록

 

  • 시인의 마을
  • 탁발승의 새벽노래
  • 떠나가는 배
  • 촛불
  • 사랑하는 이에게
  • 북한강에서
  • 애고 도솔천아
  • 서해에서
  • 이 사람은,그의 노래는
  • 아가야, 가자
  • 아, 대한민국...
  • 우리들의 죽음
  • 비둘기의 꿈
  •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
  • 사람들
  • LA스케치
  • 나 살던 고향
  • 92년 장마, 종로에서
  • 정동진1
  • 건너간다
  • 오토바이 김씨
  •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
  • 서울역 이씨
  • 날자, 오리배...

 

6. 기타 링크

 

정태춘 팬카페 '그늘진 마음의 벗'정태춘 팬카페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정태춘 박은옥 공식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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